존비비어의 순종 요약발췌
순종
1. 나의 피나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하는 여호와
존비비어 목사님이 자신의 아들이 엄하신 선생님을 만날 때 아이가 학교 생활이 즐겁지 않아 힘들어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전학한 새 학교에서 그와 반대로 인자하기만 하신 선생님을 만났지만 오히려 학교 학습능력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아이의 학습이 걱정되 옮긴 세 번째 학교에서는 인자하며 엄하신 선생님을 만나 학습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하며 아이에게 필요한 부분을 공급하신 좋은 권위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행동을 바꾸어야 하기에 즐겁지 않은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공부하던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처럼 권위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권위를 자기 즐거움의 장애물로 본 “내가 수긍할 수 있어야 권위에 복종하겠다”라는 마음 그것이 나의 마음이었다.
몇 년전 이 책을 읽고 순종하는 마음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거역하는 마음은 어떻게 지도자를 신뢰하지 하는 마음에 매우 힘들게 했다. 그 책을 다시 대하며 지금 나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뒤돌아보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순종을 생각하면 창세기 1장 1절이 생각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 성경 말씀 견해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야?” 하던 마음을 정할 수 있는 구절이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그것이 순종의 출발점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순종하면 사람이 보기에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보며 권위에 대해 상황에 대해 순종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2장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하늘에 있는 하나님께 또는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일이다. 그것은 그래도 믿음의 사람들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직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내게 참 어렵다.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월, 수, 금 오전에 출근해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물건을 판매하는 교육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인드 교육도 모두 판매를 위주로 한다. 그 교육을 받고 있다 보면 내가 판매하는 사람인지 교사 인지 모를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 안에 화가 나기 시작한다. ‘또 그말이야 내가 교사지 판매부야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내 안에 시작한 분은 내 시간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가고 인상쓰고 미워하는 마음을 부었다. 가라지가 한없이 자라는 마음 불평불만하는 마음으로 독이 되었다.
그런 내 마음이 편할리 없다. 그렇게 몇 개월 속에 내 안에 기쁨이 없음을 슬퍼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왜 직장상사에게 순종하지 못하니?” 라고 물으셨고 “하나님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교육도 쓸때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런 내 마음에 하나님은 “모든 권위는 나로부터 온단다 그 권위가 내 말씀과 반대되지 않는 다면 너는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음성을 듣고 지금은 직장에서 주어지는 일에 순종하려고 한다. 지금 내가 보기에 유익이 없어 보이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권위에 순종하려고 했다. 그 순종 속에서 보이는 것은 직장에 대한 복음전도였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나는 그분의 뜻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내 마음속에 판단으로 올라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순종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죄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떠나 있는 것
곧 기말시험과 교회집회가 있다면 나는 어디에 참여하여야 할까? 또 직장에서의 일과 교회에서의 일이 겹칠 때 모두 충성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참 어려운 문제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걸까? 전에 이런 상황이 있을 때 극단적으로 행했던 적이 많았다. 무조건 교회에 참석하거나 아님 도망가거나 그리고 마음은 평안치 않고 혹 삶에 어려움이 왔을 때 교회 일을 안했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느끼게 되었다.
잔치의 비유에서도 소팔러 가고 땅사러 가고 장가가야 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중심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나쁜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중심의 삶을 말함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잔치의 삶 그것이 하나님의 잔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대신 내가 나의 삶에 항상 성실히 살되 하나님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말씀하실 때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 깨어 있는 삶이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사는 삶이다. 직장에서의 삶이 하나님과 별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교회 안에서 만의 삶이 아니라 온 삶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산다면 그분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게으름이 없도록 늘 묻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순종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깨어 사는 자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거하는 삶 아버지께 붙어 있는 삶.
요한셀 김자영
4장 미혹의 대가 사탄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3:1)
말세의 때는 정부나 무신론자들이 믿는 이들을 핍박 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 안에 미혹이 만연한 때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시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1:22) 오늘날 훌륭한 설교와 교육을 좋아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삶을 더 사랑하는 교인이 많다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자기 소원은 흔쾌히 내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권리와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미혹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비책은 전달된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지식이다. 성경 지식과 정보와 하지 말라는 명령만 듣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율법주의에 빠진다. 그런 지식과 정보와 명령을 부모에게 듣든, 목사나 테이프나 책에서 듣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해야 한다. 그때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으면 미혹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시된 지식은 어떻게 받는가? 하나님을 간절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할 때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2)그분의 말씀 앞에 떠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든 없든 즉각 순종한다. 그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뱀은 하와의 관심을 금지된 나무 한 그루에 집중시켰다. 하나님을‘주시는 분’이 아니라 ‘빼앗는 분’으로 보게 했다. 주님이 불공평한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 뱀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공략했다.
하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나무 하나에 집중하다보니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과 선하심을 잊어버렸다. 미혹당한 인간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잃었다. 인간이 사탄을 좇아 반역함으로 사탄이 지배하고 파괴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지금도 사단은 동일한 전략을 쓴다. 자기 위에 있는 권위가 못마땅해 하나님이 주신 자리(직장,교회,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자기 삶이 침체되는 것 같거나 현재 자리는 장래가 없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회가 생기면 성령이 떠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아도 일단 떠난다.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순전함마저 타협하며 떠난다. “이 자리에 있을 만큼 있었으니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노리를 편다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양의 시험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키는 것을 놔두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아셨다. 당장은 힘들어도 끝까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셨다.
5장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 받아 주신다. 하나님이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는 현대 신학은 틀렸다.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위험한 주장이다. 우리를 지키고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출20:20)타락전 아담과하와의 행동은 선악의 지식이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지배 되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그분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최고의 예배는 순종이다.
불순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누구든 가인처럼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일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제한적인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며, 자신이 하나님만큼 때로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줄 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 눈을 열어 분순종의 영역을 보게 하신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기인처럼 우리도 진리를 볼 수 없다.
6장 순도 백퍼센트 순종
참된 회개에서 등을 돌리면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렇게 불순종하는 행동을 반복하기 쉬워진다. 둘째 미혹의 휘장이 마음을 덮어 죄를 깨다는 감각이 둔해지며 결국 그 감각 대신 논리적인 판단을 넣게 된다. 그 다음에 죄를 지을 때는 비수가 이전만큼 예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붙잡으신다. 언제나 우선 그분은 직접 죄를 자각하게 함으로 다가오려 하신다. 하지만 불순종을 반복해 미혹의 휘장이 생겨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과 단절된 상태라면 그분은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내신다.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내셨는데도 듣지 않으면 한나님은 심판을 통해 다가 오려하신다. 고생이나 질병을 통해 심판하신다.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순종이 발각되면 남을 탓한다. 자기 행동을 책임지지 않는다. 당신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삶에 불순종이 들어오는 걸 허용한다면 그 책임은 당신이 지게 될 것이다.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7장 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거역과 사술의 영적관계를 아는 발람은 왕에게 이스라엘 진 안에 모압 여자들을 몰래 들여보내라고 했다. 발람은 여자들에게 우상을 들고 들어가게 하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했다. 거역이 이스라엘에 사술의 저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안 것이다.
하나님이 밝히 계시하신내용에 불순종할 때마다 사술의 저주의 영향력 아래 제 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쉽게 공격받게 되었다. 그들은 좌절에 빠져 비난할 대 상을 미친 듯이 찾는다. 남에게 탓을 돌리는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 마음에 어둠이 덮인다. 또 불순종 덕분에 마음대로 공격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 영들이 뒤엉킨 올가미다. 미혹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기의 불순종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그러다 보니 정작 자기가 벗어냐야 할 미혹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순종하면서도 고생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순종하는 사람의 고생과 사술에 빠진 사람의 고생의 차이는 순종하는 이는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부질없이 벽에 머리를 찧고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산을 빙빙 돌고 있는 것도 아니다
8장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그리스도인은 인간 권위에 접할 때마다 성격을 넘어서 직분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 사람들 위에 있기 때문에 인간 권에에 순종한다. 그 사람 성격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은 그 사람이 그런 직분을 가질 만한 사람이락 htodrkr하든 그렇지 않든 존중해야 한다.
“인정사정 없고, 철두철미하게 악한 지도자들이 있다. 어떻게 감히 그 사람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의 통치를 받은것은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요셉이 죽고 나면 곧바로 다른 바로가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리라는 것을 이미 아셨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우리가 편안함이나 세상의 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구속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심이다.(출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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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셀 김자영
9장 ~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없다는 명백한증거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수님을 묘사했다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리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으시다.
자기 의에 빠져 판단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의 흠을 잡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분노하신다.
“너의 백서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행23:5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딤전 2:1-3
권위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명령이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
한나는 엘리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고 자기 행동에 집중했다. 한나는 진정여호와를 경외하는여자였다. 지도자에게 잘못이있다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다루실 것이다. 이런 참된 복종과 겸손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이필요한지 모른다.
하나님이 권위를 두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사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그 사람에게서 받을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겉모습 너머에 있는 것을 보며,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공경한다면 말이다.
권위아래 있는 사람이 심판의 멍에를 자기 어깨에 멘다면 그것은 더는 기성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을 높여 지도자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이 자기위에 두신 사람들 위에 올라선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보다 더 위에 있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제대로 심판을안 하시니 제가 하겠습니다.”
한나는 본능적인 논리로 살지 않고 여호와와 영적 권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을 믿었다.
교회에서 권위 있는 사람이 노골적인 타락이나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드러난다면 그 사람의 더러운 샘에서 더는 물을 길어 마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는 그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무척 단호하게 가르친다. 지도자가 간음이나 동성애나 착취나 절도나 이단이나 그 외 죄에 빠진 것을 당신이 알고 있는데도 (혹은 사람들에게 폭로되었는데도) 그 지도자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다.
증인이란 풍문이 아니라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회를 떠나서도 그 목사를 비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살아갔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좇는 이들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있으며, 그분을 통해 받을 수있었다. 예수님은 친히 검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둘로 가르셨다. 진정 하나님을 좇는 자들을 닮은 심령과,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반항심으로 눈먼 자들의 심령을 가리신 것이다.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눅 2:34-35
아프리카에서는 외모나 포장에 상관없이 모든 사역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영접한다. 그렇게 영접하고 공경하기에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의 복을 받는다. 미국에서는 포장이 그럴듯하지 않으면 공경도 하지 않는다. 겉포장과 공경이 비례 관계다. 사역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영접하고 공경하는 만큼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에게 받게 된다. 우습게 여기면 그렇게 받는다. 극진히 공경하면 당신에게도 공경이 돌아온다.
유일하게 권위에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유일한 예외다. 바로 하나님이 말씀에 명시하신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을 권위가 우리에게 시키는 경우다. 다시 말해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하면 순종할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우리는 겸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히 11:35-38
모든 성도가 오직 나와 교제하고 기도함을써 모든 정보와 지혜와 지시를 얻는 것이 내 뜻이라면 나는 애당초 교회 안에 권위를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자녀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 생활만으로 얻을 수 없게 하려고 교회 안에 권위를 두었다. 자녀들은 내가 지도자들을 통해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칩 h의 물과 같아서 그가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여기 왕이란 내 위에 있는 권위를 가리킨다. 왕이 경건한 사람이든 잔인한 사람이든 왕의 마음은 늘 하나님 손에 있다.
왕을 비하하거나 강요하거나 조종하지 않았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실 성령의 능력을 믿었다.
누군가를위해 중재하려고 나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을 모르는체 한다는 뜻이 아니다.오히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대가 받을 심판 자리에 오라서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그 사람이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는것은 알지만, 제가 이렇게 자비를 구합니다. 그 사람대신 제가 심판을 받겠습니다.”
당신이 기도 중에 어떤 음성을 들었다고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내용이 권위 있는 사람의 지시에 어긋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까다로운 지도자에게도 순종해야한다.
까다롭다 - 괴팍하다, 악하다,불공평하다,비뚤어지다.
지도자들의 가혹한 대우를 견뎌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본성적 사고와 어긋나는 개념이다. 논리상 모순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이런 대우를 통해 세가지 방식으로 복종하는 마음을 빚으신다. 첫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여지를 남겨 둔다. 둘째,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길러 준다. 셋째, 그런 대우 밑에서 우리가 복종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신다.